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울리히 츠빙글리 (문단 편집) ==== 대립 ==== 츠빙글리는 [[취리히]]에서 달성된 개혁을 다른 [[스위스]] 도시에도 파급하려 했다. 하지만 더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[[재세례파]], 신학적 측면에서 대립하게 된 [[루터교회]]와 대립하게 되었으며, 정치적으로도 스위스의 여러 자치주는 [[가톨릭]] 지지파와 개신교 지지파로 나뉘어서 대립을 시작했다. 당초에는 토론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며, 바젤과 베른이 개신교 개혁에 가담했다.(1529년 이 때문에 [[에라스뮈스]]가 바젤에서 떠났다.) 1528년 베른의 토론회에서 개신교 대표들이 모여 논의를 하였고, 츠빙글리는 루터파와는 갈등이 깊어졌지만 지지 자치주를 모아 동맹을 결성할 수 있었다. 가톨릭 지지 자치주들도 이에 반하여 연합을 결성했다. [[신성 로마 제국]]의 [[헤센]] [[방백]] [[필리프 1세(헤센)|필리프 1세]]는 [[카를 5세]]에 대항하기 위해 개신교 대동맹을 결성을 구상했으며, 츠빙글리 역시 끌어들이려 했다. 필리프 1세는 츠빙글리와 루터를 화해시키기 위하여 루터의 친구 [[필리프 멜란히톤]]까지 초청하여 자신의 영지인 [[마르부르크]]에서 1529년 10월 회담을 가지도록 주선했다. 하지만 [[성만찬]]에 관한 견해 차이 때문에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. [[루터교회]]와의 협력이 완전히 단절되었지만, 츠빙글리는 취리히와 [[베른]]만으로도 주도권을 잡아 스위스 전역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. 하지만 츠빙글리의 태도에 우려를 드러낸 베른은 취리히와 노선을 달리하게 된다.[* 특히 츠빙글리가 주장한 [[용병]]업 금지는, 당시 용병업이 주된 생계인 스위스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.] 츠빙글리는 가톨릭 지방에 대해서 생필품을 차단하는 경제봉쇄를 단행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